분당 새도시 위치

1989년4월27일 정부의 새도시 건설 발표로 인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분당의 위치는 서울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약25km, 강남에서는 약1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고 경부고속도로와 분당-포이동, 분당-올림픽 대로간 도시 고속화 도로, 수도권 순환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쾌적한 자연환경으로 말미암아 주거지로는 서울 주변에서는 가장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발표한 개발대상지역은 경부고속도로 동쪽의 남단 녹지 중 군사시설과 서울 공항의 비행 권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곳은 대체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평탄한 지형이었다.

 정부발표당시 대상지역은 논 30%, 밭 34%, 임야 29%, 대지 4%, 기타 2%로 대부분 농경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계획지구 내에 가옥을 소유하고 있던 세대는 2,193가구에 7,509인이며, 이들 가옥에 세입자는 2,513가구 7,914인으로 총 4,706가구에 15,42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분당의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새도시 지역 대부분이 과거 광주군 돌마(突馬)면이었고 분당은 단지 돌마면의 한개 리(里)에 불과했다는 점에 비추어 분당시가 아니라 돌마시가 되어야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분당의 당자가 당나라 당자라 새도시의 명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분당 이름 유래

조선시대 광주군 돌마면 분점리와 당우리가 1914년 광주군 돌마면 분당리로 되었다.
盆唐의 이름은 "당모루", "장터", "안골", "점골" 등 자연마을을 합한 이름으로 옛날에는 "동이점"이라 불렀고, 그후 "분점리"라 불리다가 다시 "분당리"라 부르게 되었다. 盆唐은 분점리(盆店里)의 "盆"자와 당 우리(唐隅里)의 "唐"자를 합한 이름이고, 분점리는 동이를 구웠다는 옹기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당 우리는 堂집이 있어 당 모퉁이 동네라고 하던 것이 堂모루가 되었고, 고려말기 우리 나라에 귀화한 당성의 후손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唐모루'라 불렀으며, '당모루'가 '당우리'로 된 것이다.

동이점 : 장안동 양영 고등학교 근처, 조선시대에 옹기를 구워 팔던 곳

당우리, 당모루 : 현재 푸른마을이 들어선 위치에 옛날에 당(唐)집이 있어서 당모퉁이 동네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며 당우리의 당자가 堂이 아닌 唐인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면서기의 실수라는 주장도 있다. 당우리 지역은 옛날 신창맹씨(新昌孟氏)의 사패지로 세조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신찬군(新昌君)에 봉해진 맹석흠(孟碩欽)의 묘를 성덕산(불곡산의 다른이름)동북쪽 기슭에 쓴 후, 그 후손인 신창맹씨가 묘 아래에서 살기 시장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는데 그후부터 인근에서 이 마을을 가리켜 당모루 즉 한자어로 당우리라 불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맹씨는 고려말기에 우리 나라에 귀하한 당성(唐誠)이 시조인 중국계 성씨로 의례 조선시대에는 중국 하면 당나라를 연상하면서 당 모루라 불렀다는 것이다.

한편 분당 새도시 개발계획도는 "앞발을 들고 일어선 당나귀" 와 "녹수를 마시는 당나귀",
"여명을 응시하는 당나귀" 상을 모델로 했다. 원래 당나귀는 체질이 건강하고 지구력이 있는 동물로 옛날부터 우리 민족과 친근하며 희망의 상징이다.



분 당 동

분당 새도시 이름 유래와 같다.



서 현 동

시범단지인 서현동은 `통로골`, `안골`, `고개안`, `된섬말`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1915년부터 지금 이름으로 불렸다. 서현동은 옛 마을 둔서촌(遯書村)의 書와 양현리(陽峴里)의 峴자를 모은 것이라고도 하고, 3백여 년 전에 베고개 너머에 서당(書堂)이 하나 있어 그 서당에 가려면 고개를 반드시 넘어야 했다는 데서 書堂에서 書자를 따고 고개를 峴자로 표기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하다.

베고개(피고개)는 이매동에서 서현동으로 가는 도중 분당동과 통로골(지금의 연수원 근처)이 갈라지는 지점에 있던 고개인데, 그 지형이 용의 머리형상과 꼭 닮았으며, 그 옛날  용의 목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길을 새로 내던 작업 도중에 문득 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는 놀란 사람들이 "우리가 용의 목을 베었다!"고 탄식하여 `베고개` 또는 `피고개`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서현동에서는 李朝 정선군수를 지낸 한승원(1465-1514)을 비롯하여, 경기도 관찰사와 형조참판을 거쳐 훗날 영의정에 추증된 조몽정과 임진왜란 때 영해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한효순(1574-1608)의 묘가 있다. 조몽정 一家와 한효순 一家는 인목대비 폐출에 뜻을 같이했는데, 무덤 역시 마주 보이는 것은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다.



수 내 동

현재 양지마을로 불리는 수내동은 조선 중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새도시 개발 전 자연마을은 숲 안, 너머 역 말, 역 말, 요 골, 절 골이 있었으며, 역 말은 서울에서 충주 쪽으로 가는 도중인 말죽거리에서 30리에 해당되어 역 촌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구릉을 넘어 마을이 있는 `역 넘엇 마을`로 불리던 것이 넘엇 말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곳은 또 한산(韓山)이씨의 집성촌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 낙계(落溪)라 부르던 곳으로 조선조 숙종-영조 때 벼슬(예조참의)을 했던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1699-1758)가 벼슬을 물러나 이 일대에 숲을 가꾸니 숲안(藪內 )이라 불러지다가 한자어로 표기되면서 유래했다.

한편 이병태(李秉泰)는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27년 영조 때 예조참의에 올라 그 무렵 왜곡에서 보내온 서신에 대해 응당 참의로서 답신을 보내야 하나 조부가 임진왜란 당시에 죽은 한 때문에 예(禮)를 회피하기 위해 사직하였다. 다시 호조참의가 되어 영조의 탕평론을 배척한 사건으로 파직되어, 후에 경상감사에 보직됐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내린 도승지 직책마저 거절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협천 군수에 부임했다. 후에 청백리(淸白吏)로 기록에 올랐고, 이조판서에 추증 됐다.

 이 지역의 유적 유물로는 한산 이씨 선조묘(경기도 기념물 116호, 중앙공원 소재), 수내동 가옥(경기도 문화재자료 78호, 중앙공원), 한산 이씨(정려, 신도, 유사비), 지석묘 21기(중앙공원), 보호수 4그루 등이 있으며 대부분 보존되고 중앙공원 등에 이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야 탑 동

야탑동(野塔洞)은, 3백여년 전 마을 벌판에 탑(土塔)이 있었기에 붙여진 탑골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상탑(웃탑골), 중탑(양짓말과 응달말), 탑골(梧野所)의 자연마을들로 이뤄졌던 마을로써 오야소란 원래 부락 앞의 들이 넓고 마을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동나무 들마을`이라고 하다가 오동나무의 열매가 많이 열리는 마을 즉 `오야실(梧野實)`로 변하였으며 그것이 또 `왜실`로 줄었다가 한자화 할 때 처음의 뜻을 살려 `梧野所`라 했다.

 이 오야소에는 동래 정씨가 처음 이주해 대대로 정착해 살았고, 양짓말에는 경주 이씨가 정착해 살았다. 동래 정씨는 고려 호장 정문도의 후손인 정익화가 상탑(웃탑골)으로 들어와 살다가 오야소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후손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는데 이곳으로 정착하게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 경주 이씨는 국당공파 후손인 숙의 5남 첨지 충주부사 이경표(광해군 때 인물)가 처음 중탑 양짓말에 정착해 살았다고 하나 역시 들어오게 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야탑동 오야소 자리(현재 군인 아파트 앞)에는, 관리번호 15호인 상수리나무가 있는데 1783년 무렵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야탑역에는 수령 3백여 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이 두 그루의 나무는 91년 移植한 것인데 모두 건강하게 뿌리를 내렸다. .



이 매 동

현재 이매촌인 이매동은 이무술이라고 불리는 자연마을로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안말, 갓골, 물방아거리 포함)였으며 서쪽으로 판교와 남쪽으로 신갈, 그리고 넓은 들을 가로지르는 탄천이 흐르는 옥토 농경지였다. 탄천주변에 굴앳돌이라는 물막이 방접이 있는 곳이어서 어느 여름날 장마가 끝난 후 동민들이 천렵을 즐기다 한아름 되는 큰물고기를 안고 나와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 모든 동민들의 꿈에 죽은 물고기가 천년만에 승천하려던 이무기라는 것과 그 이무기의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 하였고, 그 이무기의 짝이 밤마다 마을 어귀에서 소름끼치게 울어 동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이에 전 동민들의 합의로 위령 승천제를 지냈더니 굴앳돌 제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 뒤 동민들의 꿈에 다시 이무기의 화신인 듯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승천제의 지극 정성에 보답하는 뜻으로 동민들의 식생활에는 어려움이 없게 하겠지만 앞으로 삼 백 년까지는 이곳에 인물이 나지 않을 것이니 업보로 생각하고 근신할 것을 명하고는 비몽사몽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꿈이 한결같음에 놀란 동민들이 기이한 생각에 승천제를 지냈던 자리에 가보니 난데없이 매화 두 그루가 솟아있어 그 후부터 이매동이라고 동명을 고쳐 불렸다고 한다.

또한 이매동(二梅洞)은 조선 중엽까지도 수목이 울창한 산간지대였으나 2백여 년 전 순흥 안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임의술`이라 부르다가 移梅동 또는 임의곡(任意谷)으로도 불렀고 1915년부터 `二梅里`라 부르게 됐다는데 그 사유는 정확치 않다 다만, 풍수지리설에 비춰보면 산세가 2개의 매화꽃 형국을 이루고 있어 二梅里라 한다는 속설이 전해오는데, 어느 지점을 가르켰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이전의 소속관청이었던 돌마면의 경우도, 옛날에는 석마촌(石磨村)으로 기록했는데 그것은 돌(石)을 갈다(磨), 즉 돌마인데 지금은 突馬라고 부르는 것처럼 移梅谷도 오늘날 二梅동으로 기록하는데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바른 명칭일지는 알 길이 없다. 이매동은 원래 `안골`, `갓골`, `물방아거리` 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불렀던 지명인데 그중 물방아거리는 옛날에 물방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새도시가 들어서기 전에는 그 자리에 물레방아는 보이지 않고 과수원이 있었다.

이매동의 오래된 수목으로는 둘레 2.5m, 나무키 28m, 수령 250년의 느티나무 (중앙공원으로 移植)가 있는데, 나무가 섰던 자리에는 원래 커다란 고목(전나무였다 함)이 있었으나 어느 날 벼락을 맞아 죽고 마을에서 서당훈장을 하던 김용기 씨가 심은 것이라 전해온다. .



율 동

율동(栗洞)은 안말, 큰말, 도랫말 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부르는데 글자 그대로 밤이 많이 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붙여진 것처럼 산에 밤나무가 많다. 전해오는 말로는 약 5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마을을 이루었는데 밤 한송이가 3근이나 되는 것을 땄다하여 `서근밤` 또는 `서근뱀`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취율리(取栗里)라 불렀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돌 사람(石人)`이 있어 석인리(石人里)라 불렀고 조선 中葉에는 `산일리`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1915년에 율리(栗里)라고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안말에는 옛날 순흥 안씨가 살았다 하여 안씨말(안씨마을이 변해 안말이 됨), 장성(將星)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고 해서 사방에서 지리학자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새마을 중앙연수원 뒤 가장 높은 봉을 매지봉이라 하는데 천지개벽 때에 이 일대가 물에 잠기고 무명 한 끝 정도만 남아서 매가 앉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연수원 산 일대에는 순흥 안씨 조상들의 묘가 많이 있다. 한편 큰말에 가장 먼저 정착한 집안이 진주 유씨와 청주 한씨다. 진주 유씨는 중종 14년(1519년)에 태어나 명종에서 선조 때까지 형조참의를 비롯하여 여러 벼슬을 한 유종선(1519-1579)이 처음 정착하여 자손을 낳아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율동에 살고 있다.

청주 한씨는 한계희(1423-1482)의 사패지(賜牌地:조선시대 나라에서 내려준 땅)가 되면서 그 아들 한사문 때부터 율동에서 살았다. 한계희는 잘 알려진 대로 세조에서 성종 때까지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경국대전과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했다. 율동 연수원 입구에는 5m 둘레의 수령 350년 가량의 느티나무(보호수5-2-4)가 오늘날 몰라보게 달라진 율동 일대의 지나간 역사를 간직한 채 의연히 서 있다. .



궁 내 동

경부고속도로 표 받는 곳이 있는 궁내동(宮內洞)은 朝鮮 中宗의 다섯째 아들인 덕양군 이기(李岐)와 영희군 부인 권씨의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작은 궁을 지었기 때문에 궁내 또는 궁 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궁을 찾아볼 수 없고, 약 200년 전에 지은 옛집에서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궁 안의 동쪽에 있는 봉 바위는 부엉이가 살고 있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또 궁내동에 장이 서는 들이 있었는데 이곳을 `장터거리`라 불렀으며, 지금의 판교장이 그것이다. 지금도 장날이 되면 마을주민들이 모여들지만, 흥겨운 장터풍경은 찾을 수 없고 다만 흔적만 남아있다.

궁내동 서쪽에는 이 동네 명칭의 유래이기도 한 덕양군과 그 손자인 이수를 비롯해 여러 왕자들의 묘가 있다. 이수는 덕양군의 손자로 선조 2년(1569년)에 태어나 임진왜란 때 선전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광해 9년(1617년)에는 왕정에 대한 상소로 전라도 순천에 4년간 유배되었다가 뒷날 인조반정으로 복권하여 정2품 숭헌 대부를 제수 받았고, 인조 2년(1624년) 이 괄의 난과 1629년 정묘호란 때 인조대왕을 강화도로 호종 하였다.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1품인 현록대부로 추서되고 현종8년(1667년)에 충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묘는 지난 1980년 6월에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궁내동에는 덕양군과 이수 외에도 전주 이씨의 묘가 10여기 있어 이씨 가문의 집성촌임을 알게 한다. 지금은, 덕양군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이수의 무덤 아래쪽에 있는 사당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



초 림 동

초림동은 수내동, 정자동, 궁내동의 일부를 합하여 동명을 정한 것으로 새도시개발 전 나무와 숲이 많이 우거져 있던 곳이라 초림(草林)이라 하였다..



내 정 동

'93년6월 분당동에서 나뉘어 지면서 새로 생긴 동으로 분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공원을 관할하고 있다. 동 이름은 법정동인 수내동과 정자동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붙여졌고, 마을 이름인 `파크타운`은 중앙공원 옆에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정 자 동

정자동은 전주 이씨 무산군파 후손 중에 조선중기 광주병마진영 등을 역임한 이경인이 이곳 숯내(탄천) 상류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하여 그의 아호를 취해 "정자 말"이라 불렀고, 그 후 "정자리"로 되었으며,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정자동"으로 개정되었다.



불 정 동

주변 불곡 산의 "불"자와 정자동의 "정"자를 모은 것으로 불곡(佛谷)은 "절골"이라는 옛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신 기 동

낙생면의 궁내리와 금곡리의 일부지역으로서 궁 안의 앞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궁 앞 신기(新基)라 일컬어진데서 유래되었다.



서 당 동

서현동과 분당동의 합성어이며 예전에는 논과 밭이 있던 지역에 새도시 개발과 더불어 조성된 지역이다.



매 송 동

이매동의 일부와 사송동의 일부를 편입하였기 때문에 이매동의 "매"자와 사송동의 "송"자를 따서 매송동이라 불렀다.



중 탑 동

구전에 의하면 현재의 행정구역인 상탑, 중탑은 약 300여 년 전에 탑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축조되었는지 자세하게 기록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탑이 존재하였다 일컬어왔으며 광주 이씨, 성주 이씨, 경주 이씨 등이 살았던 마을이었다.



하 탑 동

원래 탑골은 상탑, 중탑이 있었는데 중탑이 아래 있어 마을을 『아래탑골』이라 하고, 반하여 위에 자리잡은 마을을 『웃탑골』 이라고 하면서 중탑이 하탑동이 되었다. 일제 때 상탑, 하탑, 오야소가 야탑리가 되면서 그 아래 지점에 있어 하탑(下塔)이라 부르게 되었다.



판 교 동

판교는 『널다리』 라고 부르다 『너다리』 로 변음 한 것을 한문으로 바꾼 것으로 마을 앞 개울에 넓은 판자로 다리를 놓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금 곡 동

금곡동의 명칭은 쇠가 났다는 『쇠골』 한자 표기에서 金谷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날 쇳골 마을에는 금을 채취하던 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구 미 동

옛 이름 구미리에서 온 것으로 구미의 유래는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이라하여 龜尾라고 하였다 하고, 아홉 성씨가 각각 마을을 만들어 살고 있어 (九性里)로 부르다가 아름다운 일이 많다하여 『九美里』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운 중 동

운중동(雲中洞)은 산에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대장(大庄), 석운(石雲), 하산운(下山雲) 등 4개 마을을 관할한다.

                                분당시 추진위원회 WWW.SAETER.CO.KR